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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여행] 마냥 즐겁지만은 않아, 덕수궁돌담길

 

방쌤의 서울여행 


서울여행 / 서울 가볼만한곳 / 서울궁궐투어

덕수궁돌담길

덕수궁


 

이번에 서울을 여행하면서 내가 찾은 곳은 바로 덕수궁이다.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돌담길로 지금은 더 유명해진 덕수궁, 그 곳이 가진 많은 사연들을 하나하나 만나보기 위해서 조금은 차분한 마음으로 덕수궁을 찾았다.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이었다. 광무 11년인 1907년에 고종은 일본의 압력에 의해서 순종에게 왕위를 내어주고 태황제로 물러나게 된다. 순종은 경운궁의 돈덕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이 때 태황제 고종의 궁호를 덕을 누리며 오래 살라는 의미로 '덕수' 라고 정했다고 한다. 그해 11월 고종은 경운궁에 남겨두고 순종만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운궁은 고종의 궁호를 따서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덕수궁돌담길을 따라 지금 덕수궁의 입구로 사용되고 있는 대한문으로 향하는 길. 사실 내가 기대했던 정취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붐비는 길 가에서 만나는 담장 하나, 오히려 약간의 쓸쓸함마저도 느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대한문

 

현재 덕수궁의 정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다. 원래의 이름은 대안문이었지만 1904년 경운궁의 대화제로 불에 타서 없어졌던 내전 전각들의 중건이 마무리되면서 1906년에 수리를 하게 된다. 이때 대안이라는 이름이 불안하니 나라의 평안을 위해 '대한' 으로 이름을 바꾸자는 풍수상의 제안이 채택이 되어서 대한문으로 그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1914년 지금의 태평로가 만들어지면서 지형이 돌출되어 있던 경운궁의 동쪽 담장과 포덕문이 헐려나갈 때 함께 뒤로 밀려나서 제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 후 1968년 도시계획에 의해 태평로의 폭을 넓히면서 대한문은 다시 한 번 그 자리에서 14m나 되는 거리를 물러 앉게 되었다

 

사실 나는 광무개혁 당시 국호를 대한으로 선포하면서 대안문의 이름을 이렇게 바꾼 것인줄로만 알았는데 이런 사연이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대한문에 도착하니 근위병의 교대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경복궁에서도 한 번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꽤 자주 보게되는 교대식이라 그런지 그 모습은 조금 달라도 눈에 많이 익숙하게 다가오는 듯 하다

 

 

 

 

대한문의 양 기궁 아래쪽에 자리잡고 앉아있는 서수

 

 

 

 

지금은 이렇게 철제구조물에 갇혀서 안전? 하게 보관이 되고있다. 원래 이 아이는 이 곳에 있던게 아니라 대한문이 지금처럼 뒤로 밀려나기 전에 그 입구로 오르던 계단의 끝을 장식하던 서수였다. 대한문을 오르던 기단 양 옆의 계단은 1968년 자리를 옮기면서 지하로 묻혀버리게 되었고 거기에 조각되어있던 서수만이 지금의 조금은 어색한 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들어가면서도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저게 뭐지??' 라는 생각이 드시기도 했을 것이다

 

 

사진출저 : 네이버 지식백과

 

뒤로 밀리기 전 대안문의 모습이다. 사진을 보시면 이해가 조금 더 쉬우실 것 같아서 준비했다

 

 

 

 

덕수궁

이제 그 속의 모습을 만나러 들어간다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요즘에는 고궁을 찾을 때 마다 추녀마루 위를 올려다 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가지런히 앉아있는 7개의 토우들

 

 

 

 

대한문을 들어서면 바로 만나게 되는 금천교와 그 옆 하마비. 원래는 궁궐 밖에 있어야 할 하마비가 대한문이 뒤로 밀리는 과정에서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엉뚱하게도 문 안으로 들어와버렸다. 그리고 대한문과 금천교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구색만 겨우 갖추고 있을 뿐이지 그 모습이 조화롭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가 않는다. 억지로 끼워 맞춰 놓은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은 나 뿐인가?

 

 

 

 

금천교를 지나서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섰다

 

 

 

 

잠시 둘러보는 덕수궁 내부의 모습. 사람들이 많지 않은 길을 찾아서 움직이려 나름 노력을 하였다

 

 

 

 

 

 

 

오른쪽에 보이는 곳으로 한 번 들어가보자

 

 

 

 

함녕전

 

그 입구를 들어서면 만나게 되는 곳은 함녕전이다. 이 곳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고종이 퇴위 후 승하하기 전까지 머물던 고종의 침전이었다. 마치 월대처럼 높게 지어놓은 계단이 독특하게 보인다. 함녕전은 1904년 덕수궁 대화재가 시작되었던 진원지였다. 당시 수리중이라 젖어있던 구들을 말리기 위해서 불을 너무 과하게 피워 그 불이 나무기둥에 옮겨 붙으면서 시작되었고, 불어오는 바람에 순식간에 그 화재가 궁 전체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온돌의 구조상 그런 논리는 전혀 설득력이 없어 일제에 의한 의도적인 방화가 아닌가 꾸준히 의심을 받아왔다. 내 생각에도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라는 생각이다

 

 

 

 

 

 

 

 

 

 

이정도면 이제 집착인가...ㅡ.ㅡ;;;

 

 

 

 

그나마 오른쪽에 행랑이 남아있어 궁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유지하고 있는 듯한 안정된 느낌이 든다

 

 

 

 

집착...맞다...ㅡ.ㅡ;;;ㅎ

 

 

 

 

덕홍전

 

덕홍전은 함녕전의 서쪽에 있는 건물인데 고종이 귀빈들을 접견하던 편전이었다. 한때 명성황후의 빈전과 혼전으로 쓰이던 경효전이 있었던 곳인데 1904년의 대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11년에 다시 지어서 덕수궁 안에서는 가장 최근에 지어진 건물이라고 기록되어있다. 원래는 주위로 행각이 연결되어 있었고 함녕전과는 담을 사이에 두고 있는 별도의 영역이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마치 하나의 장소인양 뻥 뚫려있는 모습이다

 

 

 

 

 

 

 

함녕전과 덕홍전이 마치 하나의 마당을 공유하는 듯 뭔가 조금 휑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저 사이 담장이 쳐져있고 그 옆으로는 행랑이 쭉 이어지던 그 모습을 괜히 혼자 상상해보게 된다

 

 

 

 

 

 

덕수궁의 중문이자 중화전의 정문 역할을 하고 있는 중화문이다. 한때는 그 좌우로 길게 행랑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하는데 또 그 모습은 어떠했을까? 너무나도 많이 훼손되었고 변해버린 덕수궁의 모습에 점점 더 마음이 아려온다

 

 

 

 

 

 

중화전

 

중화전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긴 뒤 재위기간 내내 법전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원래는 중층 건물이었지만 1904년의 화재로 소실된 후 1906년에 단층 건물로 다시 지어졌다. 다시 지어지는 과정에서 건물 전체의 구조에서 지붕이 너무 크게 올려져 안정감이 조금 부족하다. 다른 궁궐의 정전에 비해 그 격과 규모가 많이 약화된 단층의 형태에서 약간의 아쉬움이 남기도 했던 곳이다

 

 

 

 

중화전의 내부는 막히는 곳이 없이 사방이 트여있고 바닥에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방전이 깔려있다. 북쪽으로는 임금이 앉는 어좌가 있고 그 뒤로는 일월오악도 병풍이 설치되어 있다

 

 

 

 

소란반자에 단청을 올린 천장의 장식이 무척이나 화려하다. 그 화려한 천장의 한 가운데에 틀을 위로 올라가게 만들어 용 두마리를 조각해 놓았다. 괜히 중국의 느낌이 강하게 다가오는 부분이었다

 

 

 

 

 

 

 

중화전 옆 드므에 새겨져 있던 문양. 무슨 의미가 있는 무늬인가? 여기저기 뒤져봤지만 자료들을 찾기가 쉽지 않다

 

 

 

 

드므는 '넓적하게 생긴 독' 이라는 뜻을 가진 순수한 우리말이다. 궁에서 주로 월대와 그 마당에 드므를 설치하고 안에 물을 담아두었다. 드므에 담긴 물에는 화기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도망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져 있다.

 

 

 

 

석조전과 이웃하고 있는 서관, 지금의 별관은 석조전의 오른쪽에 직각으로 세워졌고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의 분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석조전

 

조선왕조에서 마지막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겉모습만으로만 판단하면 전혀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모습의 궁궐은 아니다. 누가 이 건물을 보고 조선시대에 지어진 마지막 궁이라고 생각을 할까? 외관은 19세기 초 유럽에서 유행했었던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른 것이다. 영국인이 설계를 하고 일본의 토목회사에서 지은 건물, 우리의 궁이라고 부르기에도 뭔가 조금은 어색한 맘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석조전은 대한제국 때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는 곳으로 사용되었고 전체가 3층인데 1층은 접견장소, 반지하층은 시종인들의 대기장소, 2층은 황제의 거처로 사용했다고 한다. 광복 후에는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등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우리의 전통 궁궐과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고 외세의 입김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던 조선왕조의 마지막이 느껴지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가장 크게 들었던 곳이다

 

 

 

 

 

 

 

괜히 살짝 훔쳐보기

시간만 잘 맞추어서 예약을 하면 안을 둘러보는 것도 가능하다. 나는 늘 예정없이 떠나는 여행이라 이런 코스들을 누려보는 것은 아마도 힘들 것 같다. 예약 같은 것들을 선천적으로 꺼리는 사람이라...

 

쉽게 말하면 게으르다는 것이다ㅡ.ㅡ;;

 

 

 

 

석조전과 별관은 계단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뭔가 연못도 전혀 어울리지 않고 쌩뚱맞다. 오히려 잘 정돈된 도심속 공원의 느낌이라 뒤에 보이는 빌딩들과 오히려 더 잘 어울리는 듯한 기분도 든다

 

 

 

 

저 담장 너머로 보이는 건물이 석어당이다

 

 

 

 

석어당은 덕수궁 안에 있는 유일한 2층 목조건물이다. 단청을 전혀 하지 않은 이런 건물들을 백골집이라고도 한다. 석어당은 광해군 때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곳일 뿐 아니라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이 문책을 당했던 건물이이고 하다. 지금은 건물은 화재로 1906년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1층 내부의 모습

 

 

 

 

 

 

 

 

 

석어당을 지나서 그 뒤로 가게되면 만나게 되는 준명당

언제 지어졌는지는 확실하지가 않고 광무 원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만 하고 있다. 한때 고종이 머물면서 외국의 사신들을 접견하기도 한 곳으로 후에는 고종과 순종의 초상화를 모셔두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에 자리한 즉조당

이 두개의 건물은 짧은 복도로 연결이 되어있어서 마치 하나의 건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금은 괴석들이 놓여있는 넓은 잔디밭에도 예전에는 수많은 행랑들과 부속건물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모습만 봐서는 그 모습이 도저히 상상이 되질 않는다. 즉조당은 광해군과 인조가 즉위한 곳이고, 후에 고종이 덕수궁에 머무를 때 후비인 순헌황귀비가 1911년 승하할 때까지 사용하던 곳이다

 

 

 

 

준명당과 즉조당

 

 

 

 

즉조당, 준명당 그리고 석어당 사이로 이어지는 좁은 길을 지나

 

 

 

 

좁게 나있는 문을 하나 지나면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인 정관헌이 모습을 드러낸다. 정관헌은 러시아 건축가의 설계로 지은 건물인데 고종이 휴식을 취하거나 연회를 베출던 곳이다. 경운궁의 화제로 선원전이 불타서 없어지자 태조의 어진을 이 곳에 잠시 모시기도 했으며, 고종.순종의 어진 역시 이곳에 봉안하기도 했다.

 

서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라 난간도 철제로 만들어졌지만 그 속에는 소나무, 사슴, 박쥐 등 우리의 전통적인 문양들 역시 남아있는 모습이다

 

 

 

 

 

 

 

 

 

 

 

 

 

내가 제일 아쉽게 생각하는 부분이 바로 이 곳인데 내려가는 길의 왼쪽으로 보이는 작은 문들이 2개 보일 것이다. 그 중 가까이에 있는 문이 바로 유현문인데 외세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아 거의 온전한 곳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아픈 상처가 대부분인 덕수궁에서 어쩌면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고급 방식으로 지어진 전통 담장이 바로 이 곳이라고 한다. 꼼꼼하게 챙기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이라서 덕수궁을 찾으시는 분들은 꼭 챙겨서 보고 나오시길 바란다

 

 

 

 

집착... 정말 맞는 것 같다ㅎㅎㅎ

 

 

 

 

이제 덕수궁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돌아서 나오는 길

 

 

 

 

천천히 걸어 나오는데 괜히 마음 한켠이 먹먹하고 아려오는 기분이 든다

 

 

 

 

괜히 혼자 담장을 쓰다듬으면서 혼자 가을놀이도 해보고

 

 

 

 

꽁꽁 얼어있는 연못 주위도 한 번 걸어본다

 

 

 

 

괜히 그냥 나가기가 너무 아쉬워서 계속 주변만 두리번거리게 된다. 원래는 이 담장들도 모두 덕수궁의 안에 포함되어 있던 곳들이라고 한다. 1922년 인제가 덕수궁 서쪽에 있던 선원전 터를 관통하는 도로를 만들면서 생긴 길일 뿐이지 유서가 깊은 궁궐의 외곽 길은 아니다. 일제는 우리의 지배권을 강탈한 뒤에 덕수궁의 터를 조직적으로 분할해서 매각했는데, 이는 궁궐이 지니고 있던 국권과 자치능력의 상징성을 파괴하기 위한 전략들 중 하나였다. 그 결과 매각된 터에는 연재의 모습처럼 외국 공사관들이 수두룩하게 들어서게 되었다

 

 

 

 

1910년 당시의 덕수궁 평면도를 보면 덕수궁의 영역이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넓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옛 선원전터를 헐어내고 그 곳에 경성제일여자고등학교를 지었고, 길 건너 제사 준비소터에는 덕수초등학교를 짓고, 지금 성공회성당이 들어선 곳에 있던 교육시설인 수학원을 헐어내고 경성방송국을 짓기도 하였다. 돈덕전과 선원저을 포함해서 20개 가까운 건물들을 헐어냈으니 이런 쳐죽일 놈들이 또 어디 있을까? 이쯤에서는 나의 분노게이지도 거의 폭발 수준에 다다랐다

 

 

 

 

그만 나가자

이제는 어디로 한 번 가보지?

 

이때만 해도 내가 서울성곽길을 걷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사실 성곽길이 의미하는 것이 뭔지도 전혀 모르던 때이기도 했다. 원래는 덕수궁의 내부에 함께 있었던 중명전이나 한 번 둘러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외국의 방송국에서 촬영을 나온 모양이다. 어느나라에서 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다른 나라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찾아주는 우리의 소중한 유산들, 지금부터라도 더 잘 지켜가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재미있는 표정으로 설명도 잘 하시던 유쾌한 분이었다

 

 

 

 

천천히 돌담길을 따라 걸으면서 오늘의 덕수궁 나들이도 천천히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냥 산책삼아서, 또 지나는 하나의 여행지로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온 오늘의 덕수궁, 찾아올 때의 마음과 지금 나서는 마음이 참 많이 다르다. 늘 익히 듣고 자주 봐서 나에게도 충분히 익숙하게 다가오는 '덕수궁' 이라는 이름인데 오늘은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질까? 덕수궁은 내가 알고 있던 단순하게 구경하고 사진으로 추억을 남기는 그런 관광지가 결코 아니었다. 우리 민족의 너무나도 아프고 상처입은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그런 공간이었다.

 

더위가 물러가는 가을날에 다시 한 번 찾고 싶은 덕수궁이다. 그 때는 과연 어떤 느낌으로 이 곳이 나에게 다가올까?

새삼 궁금해지기도 한다

 

공감하시는 분들은 꾸~~욱

역사를 잊은 민족, 그 미래 역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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