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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E』

[서울여행] 창경궁, 그 아픈 역사의 흔적

 

방쌤의 서울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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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궁궐투어 / 창덕궁 후원

창경궁


 

 

조선 종로구 와룡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

나의 기대에 가득 찬 정말 오래간만의 서울여행, 그 다음 목적지는 창경궁으로 정했다

창경궁...

들어서면서부터 마음이 많이 무거워지는 곳이었다

너무나도 아픈 역사의 그 현장을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는 바로 그 곳

조선시대의 고궁, 창경궁으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딛어 본다

 

 

 

 

주차장은 창경궁 입구와 가까운 거리에 있다

이번 서울여행에서는 갓길 주차 따위는 생각도 않기로 했다

그냥 편안하게 공영주차장에 주차하고 넉넉하게 둘러보겠다는 나의 마음

쫓기듯 하는 관광은 생각만 해봐도 너무 슬픈 것 같다

4시간 주차해도 6천원이니 가격도 나름 괜찮은 것 같다

나는 물론 너무 오래 이 곳에 머무르는 바람에 14.000원이라는 주차비를 지출하기는 했지만...ㅎ

 

 

 

 

주차장에서 입구를 향해 걸어가는 길

오른 손을 담벼락에 대고 천천히 걸어가는데 그 기분도 나름 색다르고 즐겁다

 

 

 

 

창경궁 입구

홍화문이다

 

 

 

 

창경궁에 대한 간단한 소개

원래 창경궁이 있던 이 자리에는 수강궁이라는 곳이 있었다고 한다. 수강궁은 세종 때 상왕인 태종을 위해서 창덕궁의 동쪽에 창건한 궁이었고, 1483년에 성종이 3명의 대비를 위해서 이 곳에 크게 궁궐을 짓고 그 곳을 창경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창경궁은 사실상 창덕궁과 하나의 궁궐을 이루는 곳이라 이 두 곳의 궁궐을 합해서 동궐이라고 부르고, 창덕궁의 후원도 공동으로 함께 사용했다고 한다. 일정한 규칙을 따르기 보다는 지형이나 지세에 따라 자유로운 형식으로 지어진 곳이라 그 아름다움이 더 크게 다가오는 곳이기도 하다. 원래 궁궐들은 남향으로 창을 내어 짓는 것이 원칙이지만 창경궁의 중심부분은 특이하게도 동향으로 지어져 있는데 그 이유는 동쪽에 위치한 왕실 동산인 함춘원 때문에 그 곳을 바라보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외 다른 생활공간들은 모두 남향으로 배치가 되어있다

 

 

 

 

 

명정전으로 들어가는 명정문

 

창경궁에 대해서는 참 하고싶은 말들이 많다

창경궁은 임진왜란 때 다른 많은 궁궐들과 함게 불에 탔다가 1616년에 다시 지어졌다. 아무래도 창경궁의 전성기는 1830년대가 아니었나 싶다. 그 당시에 그려진 동궐도에 따르면 여러 대비궁과 공주들의 처소, 또 많은 궐내각사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수많은 정원시설들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모습이 너무 잘 설명이 되어있다

 

일제 강점기에 창경궁 안의 수많은 건물들이 헐어지고, 그 자리에 동물원과 식물원이 지어지면서 우리의 소중했던 유산이었던 하나의 궁궐이 하나의 공원에 지나지 않는 모습으로 바뀌게 되고, 그 이름 조차도 궁이 아닌 창경원이라는 이름으로 그 가치를 깎아내렸다. 또한 종묘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던 그 연결고리를 끊어버리고 그 중간에 도로를 개설해서 궁궐의 품격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이후에 창경궁의 본래 모습을 복원하려는 수많은 노력들이 이루어졌고 동물원을 이전 하려는 등 많은 관심의 결과로 절대 완전 할 수는 없지만, 또 복원하지 못한 수많은 유적들이 아직 남아있지만 아픈 기억, 그 속에서도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함께하는 창경궁의 건재한 모습에서 예전의 그 위대함을 그대로 느껴 볼 수가 있었다

 

 

 

 

명정문 사이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명정전

 

 

 

 

 

왼쪽으로 돌아보니 나의 눈길을 잡아 끄는 나무 한 그루가 보여서 사진에 담아봤다

 

 

 

 

  명정전

명정전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조선시대 궁궐의 전각 중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다. 창경궁의 창건되던 해인 1483년에 건립이 되어서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광해군 때인 1616년에 옛 모습 그대로 복원이 되었고 그 당시 지어진 건물이 지금까지 이렇듯 완전하게 보존이 되고 있다고 한다. 아시다시피 조선시대의 모든 궁궐들은 모두 남향으로 지어졌는데 이 곳은 특이하게 동향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창건 당시에 성종은 임금은 남쪽을 바라보고 정치를 하는데 이 곳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정전은 아니다 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럼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을 바라보는 역할을 하는 곳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명정전의 좌우에 자리잡고 있던 드므

방화수를 담아 놓던 용기로, 화마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도망가게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다

 

 

 

 

명정전 내부의 모습

 

 

 

 

명정전 입구에서 바라본 서울과 명정문의 모습이다

인조가 이 곳에서 즉위를 했다고 하는데 그는 이 곳을 바라보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숭문당

명정전 왼쪽에 자리잡고 있던 전각인데, 그 이름은 학문을 숭상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광해군 때 창경궁이 지어지면서 함께 만들어진 전각으로 추정한다

 

 

 

 

남 너머로 자라있는 소나무들에게로 절로 눈길이 넘어간다

너희들은 나에게 뭔가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은 아니니?

담 너머로 고개를 삐죽 내밀고 있는 모습에서 괜히 그런 느낌이 들었다

 

 

 

 

 

 

 

저 담 너머는 창덕궁이라고 한다

이렇게 가까우니 하나의 궁처럼 동궐이라고 불렀던 것은 아닐까

 

 

 

 

창경궁의 기이한 삶처럼 참 특이한 모양으로 자라있던 나무 한 그루

꼭 무엇인가가 보기 싫어 고개를 푹 숙인 듯한 모습이어서 한 동안 계속 바라보게 되었다

또한 많은 생각들이 들기도 했었고...

 

 

 

 

 

 

 

경춘전

이 곳은 대비의 침실이었던 곳이다. 또 이 곳은 왕비의 산실청으로도 사용되었는데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임금인 정조와 현종이 바로 이 곳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정조는 본인의 탄생을 기념해서 내부에 탄생전이라고 직접 적은 현판을 걸어놓았다. 또 경춘전 현판은 순조 임금이 직접 쓴 글이라고 한다

 

 

 

 

 

환경전

이 곳은 왕과 왕비의 침전이었다. 중종과 소현세자가 돌아가신 곳이기도 하며 건물의 뒤편에는 여러 대비들의 침전들이 밀접해있는 곳이었으니 지금은 그 흔적을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일제시대에 모두 정리가 된 것으로 보여진다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통명전과 양화당

 

 

 

 

 

안내사분의 설명을 들어며 창경궁을 관람 중인 많은 사람들

나도 함께 자세한 설명들을 들어보고 싶었지만 오늘은 조금 조용하게 혼자 창경궁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이미 대략적인 공부는 미리 해왔었기 때문에 혼자 관람을 하는데도 크게 무리는 없었다

 

 

 

 

원래 이 공터에는 후궁들이 거주하던 숙소가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지만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 모두 헐어버렸다고 한다.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원래의 그 모습이 더 궁금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영춘헌과 집복헌

영춘헌은 창경궁의 내전이고, 집복헌은 서행각을 뜻한다. 행각은 정당의 앞이나 그 좌우에 지어놓은 행랑을 가리킨다. 행랑이라는 것은 대문간에 붙어있는 방으로 대문 안 양 옆으로 지어 놓고 주로 하인들이 거처하던 곳을 뜻한다

 

 

 

 

 

 

 

안으로 들어가서 본 영춘헌의 모습

영춘헌과 함께 붙어있는 집복헌에서는 1735년 영조의 차남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태어났고, 1790년에는 순조가 태어나기도 했다. 또 영춘헌은 정조가 머무르다가 승하한 곳이기도 해서 그 의미가 더 특별하다

 

 

 

 

뒤로도 이어지는 골목의 모습

 

 

 

 

원래는 이 공터에도 건물들이 지어져 있엇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군들이 자신들이 집결할 자리와 이동하기에 편리한 노선을 만들기 위해서 그 중간에 있던 건물들을 모두 허물어 버렸다고 한다

어떻게 가만히 관람만 할 수가 있을까?

어떻게 분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 생각해도 그 분노에 치가 떨려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바로 앞에 보이는 양화당과 저 멀리 보이는 통명전의 모습

 

 

 

 

통명전

통명전은 1883년에 다시 세운 왕실의 중심 침전의 중심 건물답게 넓은 월대를 쌓아올리고 지붕 위의 용마루를 없앴다. 가운데 세칸의 대청마루를 두고 양 옆에 온돌방을 두어서 왕과 왕비의 침실로 사용했다. 그 왼쪽 마당에는 동그란 샘과 네모난 연못이 있고 그 사이로 정원이 하나 자리잡고 있다  

 

 

 

 

통명전 오른쪽에 위치한 양화당

1883년에 중건한 양화당은 대비의 침전이지만,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했었던 인조임금이 환궁하면서 여기에서 잠시 머무른 일도 있었다

 

 

 

 

고궁들과 현대의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어울리지 않을 듯 어울리는 풍경

 

 

 

 

 

 

 

통명전 왼쪽의 연못

물이 가득하게 들어차서 흘러가는 그 풍경과 그 소리는 과연 어떠했을까 상상해보게 되는 그림이다

 

 

 

 

 

 

 

 

 

 

창덕궁으로 이어지는 함양문 앞에서 내려다 본 창경궁의 모습

원래의 그 모습은 지금보다 몇 배 더 아름다웠겠지만, 지금의 그 모습도 충분히 너무 아름다웠다

창경궁이라는 원래의 이름을 잃고, 창경원이라는 격하된 이름으로도 불리웠던 가슴 아픈 기억을 안고 있는 이 곳

지금도 그 구석구석에서 그 아픔을 가슴 깊이 느낄 수가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찾았다가, 가슴 속에 무거운 짐 하나를 얹고 돌아가는 기분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 또렷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또한 미래도 없다고 이야기를 한다

 

관천대와 춘당지 근처는 사실 돌아보지를 못했다

1월 말에 4일 휴가가 있어서 다시 서울을 찾을 계획이다

그 때는 조금 더 여유롭게 이곳 저곳을 둘러보면서 창경궁은 꼭 다시 한 번 찾아보고 싶다

 

우리의 가슴 아픈, 피눈물 나는 역사

불과 100년도 지나질 않았습니다. 함께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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