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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E』

[거제여행]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우리의 국립공원에도...

 

방쌤의 역사여행


경남여행 / 거제여행 / 역사여행

일제강점기의 흔적

거제 지심도


 

 

3.1절 아침. 오늘은 사실 집에 머무르며 조금 쉬면서 그 동안 못 읽었던 책들이나 조금 읽어볼 생각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티비에서 중계 중인 3.1절 기념방송들을 잠깐 챙겨서 보기도 하고, 김구선생님의 백범일지를 오랫만에 펼쳐 들고 좋아하는 부분들을 잠시 찾아서 읽어보는 시간도 가졌다. 잠시 커피가 한 잔 마시고 싶어서 나갔는데 오늘따라 하늘은 또 왜 이리도 맑은걸까? 집에만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하늘과 볕이었다. 그럼 너무 멀리 말고 가까이로 한 번 나가볼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럼 오늘은 어디로 한 번 떠나보지... 라는 생각이 다시 머리 속에 가득차게 되었다

 

어제 동백꽃을 찾아서 거제도로 떠났었는데 기상악화로 인해 배가 출항하지 못해서 헛걸음을 하고 다시 창원으로 돌아온 것이 계속 맘 속에 아쉬움으로 남아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무작정 떠나지 않고 미리 지심도터미널에 전화를 걸었다. '오늘은 출항이 가능하나요?' 라는 나의 조금은 조심스러운 질문에 예상과 달리 '기상상황이 너무 좋아서 15-20분 마다 배가 출발하고 있습니다' 라는 답변이 들려왔다. 이제는 1분 1초가 아까운 시점! 곧바로 카메라와 짐을 챙겨들고 차에 시동을 걸고 어제 다녀왔던 그 거제로 다시 출발했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의 거제 동부지구에 위치한 작은 섬. 거제 장승포항에서 뱃길로 20분이면 도착하는 아름다운 섬 지심도. 아직도 그 소속이 국방부로 되어있어 원시의 자연, 그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작은 섬이다

 

 

 

 

섬에 있는 나무 50% 이상을 동백나무들이 차지하고 있는 곳이라 동백섬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사실 나는 오늘 가벼운 마음으로 봄을 맞이하는 아름다운 동백의 모습을 만나기 위해 찾은 지심도이다. 하지만 하나하나 내가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을 만나가며 둘러보는 지심도의 그 모습은 마냥 그렇게 아름답게만 다가오지는 않았다.

 

아름다움 보다는 아픔이 더 많이 느껴지는 곳이었다는 표현이 더 적당할 것 같다. 따뜻한 햇살 아래에서 화사한 붉은 빛을 자랑하던 동백꽃 한 송이가 왜 이렇게도 슬프게만 다가왔던 것일까?

 

 

 

 

사실 오래 전 부터 지심도에 포대와 탄약고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이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것이고 이정도로 규모가 클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천천히 섬을 둘러보면서 만나게 되는 사실들은 내게 정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포진지와 활주로. 지심도에 활주로도 있었단 말인가?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일단은 포진지로 먼저 가보기로 했다

 

 

 

 

일본군이 설치한 포진지. 생각보다 거대한 규모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지심도. 지금은 유명한 관광지로 전국에서 찾아오는 관광객들로 붐비는 마냥 아름답기만한 섬이다. 하지만 70여년 전만 해도 이 곳은 일본 해군의 방어를 위한 전진요새로 민간인들의 출입이 통제되던 곳이었다. 지금으로 부터 70여년 전, 지심도는 진해만요새사령부 소유의 군사작전지역이자 일본의 태평양전행의 최후의 방어진지로 활용되던 곳이었다. 그래서 섬 전체에 방어진지와 포내, 그리고 여러 건물들이 지어지게 되었다. 이런 진지의 구축과정에서 기존에 거주하시던 주민들은 육지로 강제이주를 당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거제 전 지역은 해군작전 지역으로 선포가 되었고, 대륙침략을 위한 교두보의 역할을 하며 점점 요새화 되기 시작했다. 일본은 거제의 지리적인 유리한 조건과 육지와 연결이 가능한 이점을 이용해서 중요한 수송로의 하나로 지심도에 아주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1931년 만주사변을 거치면서 일본은 본격적인 전시체제로 전환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에도 여러 곳에 전쟁을 준비하는 요새들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병참기지화정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처음에는 포진지가 하나인줄 알았는데 길을 따라 걷다보니 또 다른 하나의 포진지를 만나게 된다

 

 

 

 

그 옆으로 좁게 이어지는 통로의 입구

 

 

 

 

바로 탄약고이다. 규모가 꽤 큰걸로 봐서는 아마도 일본군이 주둔하던 숙소도 이 곳에 함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넓은 탄약고에 가득 차있던 탄약들이 대한민국 국민들의 심장을 겨냥하기도 했을 것인데... 그렇게까지 생각이 미치니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도 하고, 너무 아프기도 하고.. 단순하게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이었다

 

 

 

 

탄약고를 지나 출구로 나오니 또 하나의 포진지가 보인다

 

 

 

 

지금은 그 속에서 새로운 생명들이

 

 

 

 

일본군이 비행기 활주로로 사용하던 곳인데 지금은 풀이 가득 자라서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있다. 괜히 예전의 모습을 떠올려보니 가슴이 이유없이 먹먹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우리나라 땅, 바다도 모자라 하늘까지 맘껏 유린하며 누비고 다녔을 그들의 모습을 떠올려보니 카메라를 쥐고있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가기도 했다

 

 

 

 

섬끝 전망대로 가는 길에 만난 일본군의 욱일기를 메어두던 바위. 간혹 그 문양이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 욱일기의 무늬가 새겨진 옷이나 악세서리를 착용하고 나와서 크게 구설수에 오르는 경우를 여럿 보았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것들이니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 조심했으면 하는 바램도 사실은 있다. 그리고 욱일승천기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잘못된 표현이고 욱일기가 정확한 명칭이다

 

 

 

 

욱일기

제2차 세계대전까지 일본의 육군과 해군에서 군대의 깃발로 사용을 했고 이 문양은 일본 군국주의를 상징하고 있다. 독일이 나치스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의 사용을 금지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자위대의 깃발에 이 욱일기의 문양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육군과 해군이 해체되면서 욱일기의 사용도 잠시 중단되었지만 얼마 후 자위대를 창설하면서 햇살의 숫자만 8개로 줄여 그 모양 그대로의 욱일기를 자위대의 깃발로 그대로 다시 사용했다. 자위대에서 욱일기를 다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오늘날 일본에서는 욱일기와 그 문양이 과거 군국주의에 대한 반성 없이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스포츠 경기에서 응원도구로 등장하기도 하고, 대중문화나 상품들에서도 욱일기의 문양이 사용되기도 한다. 과거 일본의 침략을 받았던 한국, 중국 그리고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자주 갈등을 빚기도 하는데 일본의 전혀 반성없는 태도에 그 갈등이 최근들어 점점 심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내가 일본은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진심으로 사죄하면 될 것을... 계속 인정하지 않고 되지도 않는 헛소리들만 늘어놓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이라는 국가와 대다수의 국민들을 싫어한다는게 아니라 제대로 된 역사인식과 반성이 없는 일부 몰지각한 극우세력들을 싫어X100000000000000000000000 한다는 것이다.)

 

 

 

 

해안경비초소의 역할을 하던 곳으로 보인다. 대한민국의 구석구석 여행을 다니면서 일본이 남겨놓은 아픈 역사의 흔적들을 참 많이도 만났었지만 이렇게 남쪽 끝, 바다 건너 작은 섬에 와서도 만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지금 지심도에서는 만발한 매화들도 만나볼 수 있다. 내가 너무 좋아하고 만나고 싶었던 매화였지만 바라보는 기분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다. 왜 이 아이들도 괜히 내게는 가슴이 먹먹하게만 느껴졌을까? 3.1절이라는 그 특별한 날이 주는 느낌도 분명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지만 그게 전부는 절대 아닐 것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떠났던 봄나들이에서 잠시 잊고 있었던 아픔 하나를 다시 떠올리고 돌아오게 되었다. 절대 잊어서는 안되는 우리의 아픈 역사인데 잠시나마 잊고 있었다는 사실에 독립이라는 그 하나의 꿈에 모든 인생을 바치셨던 선조들에게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죄송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것도 3.1절에...

 

아직도 제대로 된 반성과 사죄를 하지 않고 있는 그들, 스스로는 정신을 차리지도 못하고 사죄를 할 기미도 사실 보이지가 않는다. 제대로 벌을 주고 사죄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더 역사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깨우쳐 나가야 할 것이다. 적어도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되도록 나도 항상 노력 할 것이다

 

올바른 역사인식

부끄럽지 않은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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