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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여행] 창덕궁 후원, 그 비밀의 정원

 

방쌤의 여행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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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후원 겨울




경복궁에 이어 이궁으로 지어진 창덕궁,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창경궁과 함게 동궐이라고도 불리우는 곳이다

1405년 창궐 된 이후로 수없이 많은 시련과 변화를 겪어온 곳 창덕궁, 그 속에서도 가장 비밀스러운 곳에 자리잡고 있는 아름다운 정원,

창덕궁 후원으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딛어 본다.

한국 정원의 특징인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과 창과 문 밖에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건물 내로 끌어오는 듯한 차경에 능하고 비례를 이루는 건축의 미가 절정을 이루는 비밀의 정원이 바로 이 곳이다. 일반적인 궐의 배치와는 전혀 다르게 격자형의 배치를 멀리하고 자연 지세를 따라 서쪽에서 동쪽으로 파격적인 배치가 돋보이며 아름다운 경관을 가지고 있는 곳이 바로 이 곳 창덕궁이고 창덕궁 후원이다

 

 

 

 

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입장 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평소에는 저렇게 입구가 막혀있다

오른쪽 담장 너머로는 창경궁이 위치하고 있고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창경궁과 연결되는 입구인 함양문이 담장의 끝에 위치하고 있다

 

 

 

 

한국어 설명시간과 일본어, 영어의 설명시간이 모두 다르니

잘 알아두고 가시면 조금 더 편리하게 후원 관람이 가능할 것 같다

나는 운 좋게 1시에 딱 맞춰서 입장이 가능했었다

 

 

 

 

드디어 비밀의 문이 열리고 후원으로 들어서는 길

뭐 큰 일을 치르는 것도 아닌데 괜히 가슴이 심하게 쿵쾅거리기 시작한다

50명이 한 그룹으로 움직이는데 이렇게 사람이 없는 사진을 남기기 위해서는

제일 앞서서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항상 안내하시는 분 보다도 앞서서 걷게 되었다는...

 

 

 

 

  부용지와 부용정

 

후원관람의 첫 목적지인 부용지와 부용정이다

조선의 궁궐 연못들은 '천원지방',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 라는 사상에 의거해서 조성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부용지도 땅을 뜻하는 연못은 네모나게 건축을 하고 하늘을 뜻하는 둥근 섬을 그 가운데에 만들어 두었다.

살짝 살얼음이 얼어있는 부용지의 겨울 풍경도 참 아름답다. 과연 선조들은 이 곳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들을 하고

무슨 이야기들을 서로 나누었을까? 괜히 그 모습을 한 번 상상해보게 된다.

 

 

 

 

 

 

 

 

 

 

부용정

부용정은 후원에 있는 13개의 정자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항상 꼽히는 곳이다

열 십자 모양으로 지어진 그 모습도 신기하고 두개의 기둥을 연못 속에 내려두고 있는 모습도 참 이채롭다

조선시대 과거에 급제한 이들에게 주연을 베풀어 주던 장소이기도 했던 이곳은 정조가 신하들과 함께 낚시를 즐기기도 했던 곳이라고 한다

낚시를 즐기던 정조가 즉석에서 시를 짓게 하고 우물쭈물 하거나, 제대로 시를 지어내지를 못하는 경우에는

연못 가운데 있는 섬으로 유배를 보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ㅎ

이런 유배라면 저도 당장 한 번 가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부용정과 나무 사이로 보이는 곳은 사정기비각으로

숙종이 지은 사정기를 새긴 비석을 보호하고 있는 곳이다

 

 

 

 

  주합루와 영화당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 1층에 규장각을 둔 주합루이고 오른쪽에 보이는 붉은 건물이 영화당이다

주합루 주변은 3단으로 화계에 정원을 꾸며 놓았고 화계 첫 단에는 어수문을 만들어 두고 주합루로 올라 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바라보고 있는 동안 하나하나 건물과 나무, 연못의 배치에 감탄이 끊이질 않고 쏟아진다

 

정조의 정책개발과 개혁정치, 조선 중기 문예부흥의 산실로서 정약용과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 다양한 인재들이 활동하던 중요한 공간이며, 정조가 지은 어제와 어필, 어진, 인장 등을 보관하였던 장소로 그 원형이 잘 남아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 또한 건물은 경사진 높은 지형에 배치하여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으며, 1층은 왕실도서 보관에 적절한 퇴와 사분합 들문을 설치하였고 내부는 온돌을 두었다. 2층 열람실은 사방의 빼어난 경관을 조망할 수 있도록 배치하는 등 건물의 기능에 맞는 실 배분이 충실히 반영되었다. 이처럼 주합루는 역사적, 건축사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영화당은 조선시대 과거 시험장으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고 숙종 18년에 재건되었다.

영조가 친필로 기록한 현판이 걸려있으며, 건물 앞쪽에는 '춘당대'라는 마당이 있어 초시에 합격한 응시자들이

마지막 시험을 치른 곳이었지만 현재는 창경궁의 담으로 막혀있는 모습이다.

이전의 모습은 상상으로만 만나야 하지만 그 모습이 쉽게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저 약간 안타까울 따름...

 

 

 

 

주합루를 둘러싸고 있는 대나무들

취병이라고 부르는 조선의 톡특한 조경기법 중 하나로 하나의 푸른색 병풍처럼 만들어 놓은 울타리이다

내부가 보이는 것은 막아주고 또한 공간을 따로 분할하는 담의 기능도 하면서 그 공간을 더 깊고 아늑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어수문

주합루로 오르는 길목이다

길이 막혀있어 올라가 볼 수는 없었지만 그 밖에서 보는 모습만으로도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어수문을 통해 바라본 규장각과 주합루의 모습

1층은 왕실의 도서를 보관하던 규장각이고

2층은 열람실로 사용하던 주합루이다

 

 

 

 

이제 부용정과 부용지를 뒤로하고 다음 목적지인 불로문과 애련지를 향해서 올라가는 길이다

이동하는데는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마치 바로 옆에 있는 듯한 느낌

 

 

 

 

  애련지와 애련정

 

도착하니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로 애련지와 애련정이다

연꽃이 피는 연못이라는 뜻의 애련지는 불로문을 지나서 바로 왼쪽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는 연못 옆에 어수당이라는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애련정을 받치고 있는 네게의 기둥 중 두개는 연못 속에 잠겨있는 초석 위에 세워져 있다

 

 

 

 

숙종 18년에 만들어진 연못과 정자로 숙종은 '애련정기' 에서 '연꽃은 더러운 곳에 있으면서도 변하지 않고 우뚝 서서 치우치지 아니하고 지조가 굳고 맑고 깨끗하여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에 이러한 연꽃을 살랑하여 새 정자의 이름을 애련정이라 지었다' 고 밝히고 있다.

 

 

 

 

 

 

 

 

 

불로문

 

불로문은 하나의 큰 통돌을 깎아서 세운 문으로 임금이 무병장수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있는 곳이라고 한다.

하나의 돌을 깎아서 이렇게 문을 만들어 두었다는게 쉽게 믿겨지지가 않고 그 정성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곳이기도 했다.

 

 

 

 

금마문

 

이 곳은 대한제국 황제 문조로 추존된 효명세자가 독서를 하기 위해 만든 소박하고 단촐한 적각인 기오헌과 의두합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금마문은 중국 한나라 때 미앙궁에 있던 문으로, 문 안쪽에는 전각에 왕세자가 있음을 상징하는 곳이다. 순조의 대리청정을 했던 효명세자는 할아버지 정조의 개혁의지를 이어 받아서 약화된 왕권을 세우기 위해 규장각 근처에 기오헌과 의두합을 짓고 독서를 했다고 한다.

 

효명세자는 1830년 대리청정 3년 만에 22세의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았고, 후에 익종(翼宗)으로 추존되었다.

 

 

 

 

의두합

 

효명세자가 공부방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의두합은 단청을 하지 않아 단촐하고 소박하며, 또한 독서와 사색을 위해여 궁궐 내 유일한 북향 건물로 되어 있는 곳이다

 

 

 

 

 

 

 

이제는 애련지를 뒤로 하고 다음 목적지인 존덕정과 폄우사를 찾아서 다시 출발이다

 

 

 

 

  존덕정과 폄우사

 

잠시 이동 후에 도착한 존덕정과 폄우사

연못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은 관람정이고 멀리 정면에 보이는 곳이 바로 존덕정이다.

연못은 원래 두개의 네모꼴과 하나의 둥근 연못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하나의 곡선형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길지 않은 시간 우리나라에 머무르면서 정말 셀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짓들을 해놓고 갔다는 생각에

잠시 또 창경궁에서 느꼈었던 그 분노가 끓어 오르기도 했다.

 

멀리서 봐도 육각 겹지붕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존덕정이다.

 

 

 

 

한 걸음 더 다가가서 담아본 존덕정의 모습

 

 

 

 

뒤돌아 보니

왼쪽에는 부채꼴 모양의 모습이 굉장히 특이했었던 관람정이, 또 오른쪽 언덕 위에는 단칸의 사모지붕을 가진 승재정이 눈에 들어온다

 

 

 

 

승재정

가까이서 보는 모습이 궁금해서 한 걸음에 쪼르륵 달려가서 마주한 승재정

숲 한 가운데 자리잡은 자그마한 건물, 각 칸마다 창호를 달고 있고 창살의 문양이 꽤나 특이해서 눈길을 끌었었다

 

 

 

 

승재정에서 내려다 본 관람정의 모습이다

부채꼴의 모양이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폄우사

'폄우' 라는 말은 어리석음을 고친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조선후기에 제작된 동궐도에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1827년 이전에 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조들은 이 곳에 앉아서 어떤 어리석음들을 고치려 했을까?

조선시대 보다는 지금 우리나라에 더 필요한 공간이지 않을까 싶다.

나가는 길에 폄우사를 그대로 가지고 내려가서 여의도 한 복판에다가 두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존덕정

 

후원에 있는 연못인 존덕지에 지어진 정자이고 이중구조의 육각지붕으로 만들어진 정말 독특한 구조이다.

조선시대 인조 22년에 처음 지어졌을 당시에는 육모정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지붕 뿐 아니라 정자의 마루도 안과 밖 이중으로 구성되어 있고 24개의 기둥들이 지붕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내부에는 정조가 지은 '만천명월주인옹자서' 현판이 걸려있다.

정조의 친필은 아니고 정조가 지은 글이라고 한다.

 

 

 

 

사람이 많다보니 이동할 때 마다 이렇게 피난민 행렬이 이어진다

그나마 사람들이 많이 없는 사진을 남기기 위해서는

가장 늦게 출발하고, 가장 일찍 도착해야 한다. 산행으로 길러놓은 체력이 이럴 때 도움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제는 다음 목적지인 옥류천으로 가는 길

 

 

 

 

  옥류천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옥류천 정원 근처에 위치한 취한정

임금이 옥류천의 어정에서 약수를 마시고 돌아갈 때 잠시 쉬어가던 장소라고 한다.

 

 

 

 

태극정

다른 정자들과는 다르게 높은 장대석 기단 위에 지어져 있다

 

 

 

 

농산정

옥류천 바로 옆에 있는 정자로 임금이 이 곳을 찾았을 때 다과상을 올리기도 하였고

이 곳에서 주무시고 내려가는 일도 꽤 잦았다고 한다.

정면 다섯칸 중에 두칸은 온돌방으로 지어졌다고 하니 충분히 그러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 곳에서 하루 쉬어가면 과연 어떤 기분이 들까?

 

 

 

 

소요암

인조는 소요암이라는 커다란 바위를 깎아 내고 홈을 파서 물길을 끌어들여 인공적으로 작은 폭포를 만들게 했다고 한다.

또한 옥류천이라는 이름을 친필로 써서 바위에 새기도록 했다고도 전해진다.

지금은 물이 얼어있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 아래에는 아직도 선명하게 그 흔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청의정

인조 때 지어진 곳으로 궁궐 안에서 유일하게 초가지붕을 하고 있는 곳이다

임금은 정자 앞에 논을 만들어서 벼를 심고, 수확 후에는 볏짚으로 정자의 지붕 이엉을 잇게 하였다

농사의 중요함을 백성들에게 일깨워주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요즘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과연 이 곳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지금 우리나라의 농민들과 농업을 전혀 지켜주지 못하고 있는 일부 정치인들을 떠올려보니

마음 한켠이 더 아파오고 화가 난다. 저런 마음 씀씀이를 가진 왕과 함께 했던 백성들은 행복했을까?

적어도 지금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오늘 창덕궁 후원 관람의 마지막 목적지인 연경당으로 향하는 길

벌써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괜히 서운한 생각도 조금은 든다

물론 빠르게 걷고, 또 때론 뛰기도 하느라 조금 힘이 들기는 했지만 아쉬움이 더 큰 건 어쩔 수가 없나보다.

 

 

 

 

어라...신기하다

크게 한 바퀴를 돌아서 내려오니 아까 처음 출발할 때 봤었던 애련지의 모습이 저 멀리 보인다

이렇게 동선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여기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았다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보여드리기 위해서 찍은 한 장의 사진

사람 없는 후원 그 모습 그대로를 담아내기 위해서 정말 어마무시한 노력을 기울였다

 

 

 

 

  연경당과 선향재

 

연경당으로 들어가는 대문인 장락문

장락문이라는 이름은 달에 있는 신선의 궁궐인 장락궁에서 따온 이름이고

궁궐지에 의하면 순조28년에 오아세자였던 효명세자가 사대부 집을 모방해서 궁궐 안에 지은 120여칸 민가형식의 집이다

 

 

 

 

 

 

 

 

 

 

 

 

 

연경당과 선향재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입구

 

 

 

 

 

 

 

왼쪽에 보이는 건물이 연경당이고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선향재이다

단청이 없고 그 크기도 아주 아담하고 단촐해서 조선시대 사대부의 집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선향재는 서재의 역할을 하던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제 후원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는 길

 

 

 

 

나가는 마지막 길에 만난 700년 수령의 향나무

입구인 돈화문에서 150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창덕궁의 터줏대감 역할을 하고 있는 나무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 향나무는 2010년 수도권을 강타한 태풍 곤파스의 영향으로 주가지가 부러졌다고 한다

쉽게 자라지 않는 나무인데 이 자리에서 조선왕조 500년의 파란만장한 영욕의 세월을 함께하며 이렇게까지 크게 자라며

그 모든 역사들을 지켜보았을 생각을 하니 그 굴곡이 많은 모습이 마음 한켠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한다

 

 

 

 

오늘 처음 만나본 창덕궁 후원

기대했던 만큼이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1시간 30분 이었다.

처음에 총 관람에 1시간 반이 걸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뭐가 이렇게 오래 걸리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는데

막상 내가 직접 들어가서 둘러보고 나니 그 한시간 반이라는 시간이 후원을 모두 둘러 보기에는 얼마나 부족한지 알게 되었다

왕들의 숨겨진 비밀의 정원이라는 창덕궁 후원, 후원을 보지 않고서는 창덕궁을 다 보았다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글을 본 적이 있었는데

오늘에서야 그 정확한 의미를 확실하게 느껴볼 수가 있었다

 

생각보다 오랜시간 창경궁과 창덕궁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다음에 다시 찾을 때는 더 많은 시간을 두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정말 절실하게 들었다.

곧 다시 서울을 찾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밀려드는 가운데, 다음 목적지를 향해서 아쉬운 발걸음을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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