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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E』

[서울여행] 백범 김구선생의 마지막... 경교장

방쌤의 여행이야기


서울여행 / 한양도성투어 / 백범 김구

서울성곽길 / 돈의문터 / 강북삼성병원

경교장


 

서울성곽길, 한양도성투어를 마치면서 그 길을 걸으면서 만났던 여러 흥미로운 장소들을 하나씩 소개해 드릴 생각이다. 그 첫번째 장소는 강북삼성병원의 입구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경교장' 이라고 하는 곳이다. 관심이 있는 분들은 보는 순간 '아~ 그곳이구나' 라고 생각을 할 것이고 처음 들어보는 분들 또한 많이 계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교장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선행이 1945년 중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돌아가실 때 까지 생활을 하셨던 사저이기도 하고, 신탁통치의 반대 등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의 주요한 무대가 되면서 더 유명세를 떨치게 된 곳이다. 또 1949년 육군대위 안두희의 총탄에 의해 그 안타까운 생을 마감했던 곳 역시 바로 이 곳 경교장이다

 

 

 

 

경교장은 2001년에 서울유형문화재 제 129호로 지정이 되었다가, 2005년에 사적 제 465호로 승격이 되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 강북삼성병원의 입구에 자리를 잡고 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내셨던 백범 김구 선생의 집무실가 숙소가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공간이다

 

이승만의 이화장, 김규식의 삼청장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에 건국 활동의 중심을 이룬 3대 요람의 하나로 불리는 곳이고, 원래의 이름은 죽첨장이었지만 김구선생이 죽첨장이라는 일본식 이름 대신 근처에 있는 경교라는 다리의 이름을 따서 경교장으로 개명을 하였다

 

사실 일본이 얼마나 끔찍하게 싫으셨을까

 

 

 

 

 

 

 

경교장의 입구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강북삼성병원이다

 

 

 

 

입구를 들어서니 굉장히 밝고 깔끔하게 관리가 되고 있는 모습이 새삼 놀라웠다. 당연히 소중한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하고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관리가 잘 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 하고 있었지만 내 생각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경교장의 첫 인상이었다. 근무하시는 분들도 너무 친절해서 필요한 정보들은 하나 빠트리지 않고 다 챙겨 들으면서도 전혀 불편함이나 눈치 보는 일 없이 편안하게 경교장의 구석구석을 둘러 볼 수가 있었다

 

 

 

 

예전에는 이런 모습이었구나. 경교장의 주위로 아름다운 정원이 가득 둘러진 모습. 그 때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쉽게 상상은 되질 않지만 잠시 떠올려 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제일 먼저 1층을 둘러보기로 했다. 이 곳은 임시정부의 선전부가 활동했던 공간이다. 임시정부의 홍보 및 언론관계를 담당하였던 부서가 선전부였다

 

 

 

 

 

 

 

회의실

 

 

 

 

1층 응접실

 

 

 

 

환국 이후에 첫번째로 국무위원회가 개최되었던 곳이고 임시정부의 대표적인 회의들이 개최되고 김구가 국내외 주요 힌사들을 접견했던 곳이다

 

 

 

 

이제는 지하로 내려가보기로 했다. 관람이 가능한 곳은 지하와 1,2층이다. 먼저 간단하게 1층을 둘러본 후에 지하에 들렀다가 마지막에 김구선생이 머물렀던 2층을 둘러보는 것이 관람 코스로는 가장 좋을 것 같다

 

현재 지하는 전시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가슴에 깊이 다가왔던 말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미 부력을 충분히 가졌고,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우리는 그 때 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이미 가지고 있는데 왜 아직도 더 가지지 못해서 안달을 하는 것일까? 문화의 힘은 너무 가볍게 생각하면서...

 

 

 

 

정지용선생이 남긴 글이다

그대들 돌아오시니

죽음보다 어두운 오호 36년... 가슴이 먹먹해지는 순간이었다

 

 

 

 

 

 

 

대한민국의 혼이 살아 숨쉬는 경교장

 

김구선생이 반탁, 건국, 통일 운동을 주도하던 시절에는 '셔대문 경교장' 이라고도 불렀었다. 민족진영 신사들의 집결처로 사용되기도 한 곳이다. 김구선생이 안두희의 흉탄에 의해 서거하신 후에 다시 원 주인 최창학에게 반환되었고 다시 타이완 대사관저로 사용되기도 했다. 6.25전쟁 이후 미국 특수부대가 주둔하는 등 여러차례 주인이 바뀌다가, 1967년 삼성재단에서 매입하여 강북삼성병원 본관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서울시에서는 소유는 그대로 두는 대신 전체 공간을 예전 모습 그대로 복원하기로 합의를 해서 임시정부에서 사용하던 당시의 모습대로 재현하였다. 그리고 이 공간은 2013년 부터 시민들에게 무료로 개방이 되었다. 개방한지 얼마 되질 않아서 아직 모르시는 분들도 많을 것 같은데 우연한 기회에 이런 감사한 경험을 하게 되어서 더 기쁜 마음이었다

 

 

 

 

김구선생의 백범일지 친필 서명본

 

 

 

 

눈덮인 들판을 걸어갈때는

발걸음을 어지럽게 걷지마라

오늘 나의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김구선생의 개인 집무실과 침실이 있었던 2층으로 올라가는 길

 

 

 

 

2층 응접실

대한민국 임시정부시절 여러 대표들과의 회담 및 국무위원회가 개최되었던 곳이다

 

 

 

 

김구선생의 침실과 집무실이 있는 곳을 향하는 복도, 일본식 건물의 향기가 강하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그래서 더 이름을 한국식으로 바꾸고 싶어하신 것은 아니었을까?

 

 

 

 

김구선생이 돌아가시기 전 까지 머무셨던 침실

선생의 정갈하고 단정했던 모습이 이 곳에서도 슬쩍 느껴지는 듯 한 기분이다

 

 

 

 

 

 

 

침실과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있는 집무실의 모습이다

 

 

 

 

김구선생의 생전 집무실

액자 속에 소중하게 담겨 벽에 걸려있는 태극기의 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바로 이 자리였다고 한다

김구선생이 육군대위 안두희의 총탄에 의해 생의 마지막을 보내신 자리가 바로 이 곳이라고 한다.

 

그냥.. 뭐라 딱히 떠오르는 표현도.. 이유도 없는데... 한 동안 이 자리를 쉽게 떠날 수가 없었다. 그냥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우연히 길을 걷다가 만나게 된 경교장

들어갈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 들어가게 된 곳

귀찮다는 생각에 그냥 지나쳤으면 김구선생이 남긴 기억과의 만남을 놓쳐버리고 정말 크게 후회를 하게 되었을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구선생... 정말 많은 기억이 내 머리 속에도 남아있는 분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하고 그 다음해에 길을 가다 안악군의 치하포에서 우연히 일본군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토전양량이라는 일본군 중위였다. 백범은 그자를 발견하지 분노를 참을 수가 없어 그 자리에서 그자의 칼로 그를 찔러 죽이고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 이 왜놈을 죽였노라' 라는 포고문을 길거리 벽에 크게 써서 붙이고 그 아래 자기 이름과 주소를 정확하게 기입한 후 그 자리를 유유히 떠났다고 한다. 그 후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니 광무황제의 특명으로 사형 직전에 집행정지 명령이 내려져서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에는 구국운동에도 앞장을 섰고, 1908년 독립투사들의 비밀 결사조직인 신민회에 가담해서도 맹렬한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3.1만세운동에 가담한 뒤 상해로 망명해서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으로 시작해서 국무총리 대리를 거쳐 1926년에는 임시정부의 원수인 국무령에 취임하게 된다.

 

무력이 없이는 우리가 원하는 결과들을 얻어낼 수 없다는 생각에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되고 이봉창, 윤봉길 등의 인물들과 함께 활동을 하게 된다. 이봉창을 동경으로 파견해서 일본 황제를 저격하려 하였으나 그 준비나 폭약의 준비들이 너무 미약해서 실패로 돌아가게 되고 이봉창은 단두대에서 순국하게 되고, 그 이후 윤봉길로 하여금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본 천황의 생일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지게 함으로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나는 사실 이봉창과 윤봉길의사의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뒤에는 김구 선생이, 또 그 폭탄들을 제조하고 지원한 것도 김구선생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더 놀랐었던 기억이 난다. 아무래도 내가 대학생이었던 시절이 아니었나 어렴풋이 생각된다

 

1945년 일본의 패망 이후에 모스크바에서 삼상회의에서 결의된 신탁통치에 반대해서 반탁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 하였다. 이후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의되자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했다. 이승만의 정읍발언으로도 유명한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결사 반대하고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남북협상을 추진하였으나 성사되지는 못했다

 

1946년 6월 26일 집무실인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에 의해서 살해를 당했다. 김구선생이 꿈에도 그리던 그 목표, 우리나라의 모습은 단 하나 '통일된 자주적 민족국가 수립' 이었다. 정말 많은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는 한 마디가 아닐 수 없다. 누구의 신탁통치도 받지 않는  자주' , 또 남과 북이 함께 총선거를 실시해서 하나의 조국을 만들어 가자던 '통일', 그 길이 왜 그렇게 힘겹고 멀기만 한 것이었을까? 일본이 물러나면 모두 끝인 줄만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고 잠시 눈 돌릴 여유가 생기고 나니 그 '자리' 에 욕심을 내는 인물이 또 나타나게 되더라...

 

잠시 둘러본 경교장이었지만 정말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게 되었던 곳이다

내가 만약 아이가 있었다면 이 곳에 함께 데리고 가서 정말 많은 살아있는 역사의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혹시 가까이에 계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아이들과 또는 친구들과 꼭 한 번 찾으셔서 일부 사학자들이 포장한 이쁘장한 역사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여전히 숨쉬고 있는 우리의 진짜 역사와 인물들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나누어 보시길 권하고 싶다

 

길을 가다 우연히 시작된 작은 만남

잠시나마 잊고 지냈던 제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절대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바로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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